금등지사 무엇일까?
요즘 가장 즐겨보고 재방송 보고 유튭 가서 메이킹 영상까지 챙겨보는 단 하나의 드라마가 옷소매 붉은 끝동. 그렇게 보다보니 금등지사 라는 단어가 여러 블로그나 유튭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싶어 알아보았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있다고는 하는 영조의 금등지사 좀 더 공부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영조의 사도세자 관련된 금등지사 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등지사
금등문서, 금등문건, 금등이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원래 유래는 서경의 편명이며 금속으로 봉한 상자를 의미합니다. 서경의 금등편이 그 유래가 되는데, 이 부분은 중국 주나라 무왕이 병에 걸리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형인 무왕을 살려주고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글을 써서 상자에 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무왕이 죽고 난 후 무왕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이 섭정을 맡게 되었는데 주공이 무왕을 독살했다는 모함으로 주공이 낙양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무왕의 아들 성왕이 금등 속에 들어 있던 주공의 글을 보고 누명을 벗게 했다는 데서 금등지사의 뜻이 억울하거나 비밀스러운 일이 있어 이를 후대에 알려 밝히고 진실을 알게 하는 문서라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즉 금등지사란 나중에 밝혀져 누명을 벗을 수 있고 진실을 알릴 수 있도록 우선은 봉해 놓은 문서로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문서가 되기도 합니다.
영조의 금등지사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것은 주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후세에 남길 것을 명하면서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수은묘 내부에 보관하게 하였다고 하는 문서를 의미합니다.
이는 성균관스캔들과 영원한 제국, 역린, 사도 등의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야기 되기도 하면서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일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갇힌 날은 윤5월17일, 양력으로 7월8일이며 목숨이 끊어진 날은 7월12일입니다. 더운 여름날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된 영조가 자신의 그런 행위를 후회하는 내용을 적은 기록이 바로 금등지사 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도승지 채제공과 단둘이 남아 친필 문서를 주어 그것을 사도세자 신위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 내부에 보관을 명했다고 합니다. 금등이라는 상자 속은 아니었지만 사당 내부에 숨겨 놓은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영조의 금등지사 발견
정조가 즉위한지 17년째인 1793년8월8일자 정조실록에 이 문서를 입수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792년 수원 화성 건설의 의한 수원부 유수로 채제공을 임명하고 5월25일에는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이때 채제공이 사도세자와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을 처벌한 것을 제기한 상소문을 올리면서 일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1973년 8월8일 드디어 사도세자 사당 수은묘의 신위 아래 깔아둔 요 속에 간수해 온 영조의 금등지사를 공개한 것입니다.
血衫血衫, 孰是金藏千秋,桐兮桐兮,余悔望思之臺 (혈삼혈삼, 숙시금장천추, 동혜동혜, 여회망사지대)
피 묻은 소매, 피 묻은 소매여, 누가 안금장과 전천추인가(과연 누가 충신인가),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내가 망사지대를 후회하노라 라는 해석을 할 수 있는 이 글을 공개합니다.
정조가 밝힌 이 영조의 금등지사 문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위패를 모신 경모궁을 참배하고 사도세자 문제의 금기를 허물고 복권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좀 더 자세하고 재미있는 영조의 금등지사 관련 역사 이야기는 접어두고,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 아버지는 익위사였으나 죽임을 당했고, 성덕임의 어깨에는 밝을 明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휘항 등이 얽혀서 어떤 내용으로 풀이 될 지 궁금합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 11화 예고편 보면 금등지사는 아마도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세손, 동궁 시절에 찾아 내는 듯한데요, 원래는 즉위하고서도 17년째 되는 해에 정식으로 발표가 됩니다. 물론 그 전에 찾았다가 시기를 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원래는 없었는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겠죠? 과연 어떻게 풀어낼 지 빨리 보고 싶습니다.